[스크랩]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그리고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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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덩샤오핑 그리고 박정희
2005년 11월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성공한 한 경제인을 만났다. 사업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비결은 없고 모든 것이 덩샤오핑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 안에 덩샤오핑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일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향불을 올리며 손을 모은다고 했다. 자신 말고도 중국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고도 했다.
중국인들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재신(재물신)으로 모신다. 중국의 많은 식당이나 상점 등은 입구 쪽에 관우상을 모셔놓고 신선한 과일 등을 차려놓거나 밤낮으로 향불을 켜놓는다. 그 옆에는 날마다 돈을 벌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은 글(天天發財, 福)도 볼 수 있다. 이런 재신 모시기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화교권 국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사업하는 중국인들은 집에다가도 관우상을 모신다. 향불을 24시간 켜놓는데, 향불이 꺼지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해 향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성공한 중국 경제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재신인 관우에 비길 정도의 반열에 올라섰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함께 오늘의 중국을 이끈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아직도 중국 인민의 가슴속에 남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끌어내며 중국 인민의 삶의 질을 바꾼 탓에 덩샤오핑은 ‘건국의 어머니’로 불린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을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비된다.
혼돈시대를 경험한 중국인들로서는 특히 공산당원도 아니어서 별다른 신분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큰 변화를 불러온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이야말로 오늘의 자신을 만든 은인 중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오늘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덩샤오핑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단순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를 넘어 앞으로도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미신적인 의미에서 덩샤오핑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덩샤오핑도 최근에 와서 정치적으로 냉엄한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7년 3월19일, 덩샤오핑 사망 10주기가 별다른 추모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개최하지 않았으며 중국 관영 언론들도 추모성 기사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사천)성 광안시에서 동상 앞에 헌화하는 등 조촐한 기념행사와 학술연구토론회가 열렸으나 지방 정부 차원에서 실시됐다.
이렇게 추모 열기기 냉랭한 것은 최근 양극화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덩샤오핑이 고도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양적 팽창에 치중하면서 높은 실업률, 빈부격차 등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더욱이 1989년의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명령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천안문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은 덩샤오핑이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추진한 개혁 정책을 적극 지원했더라면 천안문 사태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중국이 더 균형적으로 발전하고 민주적인 사회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정책은 주춤했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통제가 계속돼 중국은 아직까지도 인권 탄압 및 독재 국가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중국 모든 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나 중심 공원 등에서 한 손을 들고 인민을 향해 연설을 하는 듯한 인민복 차림의 마오쩌둥 동상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동상을 택시 부르며 ‘따블’ 또는 ‘따따블’이라고 외치는 모습으로 빗대 희화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은 혁명기의 영웅으로서, 투쟁가로서, 지략가로서 마오쩌둥의 지도력과 정치력을 높이 사고 있다. 말년까지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는 등 수많은 독재와 탄압과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중국인은 ‘건국의 아버지’로서 마오쩌둥을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 출신인 그는 반제국주의 등을 이념으로 한 중국공산당 창설(1921년)에 참여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농민을 내세워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전파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마오쩌둥은 혁명 초기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국민당을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보였고,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 혁명 이전 중국 사회 안에 팽배해 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느낀 굴욕감 등을 고려하면 마오쩌둥의 중국 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1949년 9월 그가 말한 “우리는 봉기했다”라는 말을 중국 인민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마오쩌둥의 시대는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시기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시기까지의 27년간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공식 평가를 보면 마오쩌둥의 지도노선은 1957년 여름까지는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으나, 1957년 이후에는 기껏해야 옳고 그름이 반반이며 아주 잘못된 적도 많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2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통일하고 주권을 회복한 영웅적인 모습 이면에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책을 폈던 독재자의 모습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생애를 놓고 볼 때 그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말년의 과오’에도 마오쩌둥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고 중국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평판하고 있다.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로 ‘가이샨’(개선)이라는 용어가 있다. 가이샨은 개선이라는 한자어에서 나온 말이지만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 새로운 쓰임새가 붙은 새 용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급진적 혁명 정치로는 중국을 이끌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방식을 비판했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음으로써 정치 방식의 변화를 유도해 중국 정치를 연착륙시켰다. 그는 “개혁이 아니라 개선이다. 우리는 혁명하지 않고 천천히 고쳐 나간다. 잘한 부분은 놔두고 잘 안 된 부분만 고쳐 나가도 늦지 않다”며 가이샨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 특유의 만만디 전략을 자신의 정치 철학에 활용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이 문화혁명을 하는 바람에 세계사에서 50년을 늦어버렸는데 지금 내가 또 마오쩌둥을 부정하고 혁명을 하게 되면 우리 중국은 100년이 늦어지는 사태를 맞을 것이다."
중국공산당 일당 통치 국가였기에 자기 부정에까지 이르는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런 수사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지도자들 역시 가이샨 개념으로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이런 정치 철학이 오늘까지 중국이 분열되지 않고 통일된 모습으로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바탕이 됐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그의 가이샨 정치철학은 기업 경영 분야에도 도입됐다. 거품 경제로 몰락해 가던 일본 최고 자동차기업 도요타가 미국식 경영방식을 벗어나 가이샨 시스템을 도입해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경우와 대비가 됐다. 중국에 있는 동안 많은 중국인들은 우리나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국의 덩샤오핑과 비교해 이야기하곤 했다. 둘 다 세계 최빈곤국에서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국가 최고지도자였다. 뿐만 아니라 둘 다 성장에 따른 불균형인 빈부격차 등 양극화문제에 대한 책임과 민주화 세력을 탄압한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덩샤오핑과 비견되는 박정희 대통령을 오늘의 발전된 한국을 이끈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농촌문제를 해결한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했다. 최근 중국은 도농 빈부격차 문제가 균형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본보기 삼아 농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지방정부의 농업 관련 인민대표 등이 앞 다투어 우리나라에 새마을 연수를 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중국처럼 그리 후하지 않다. 먼저는 가멸찬 민주화 투쟁의 결과 과거의 과오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중국과 달리 정권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권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나라의 지도자를 받아들이는 국민성의 차이도 큰 것 같다. 좀더 빠른 변혁을 원하는 세대는 전직 대통령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중국에 지내는 동안 덩샤오핑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내부의 투쟁으로 세계에서 뒤처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가이샨의 개념을 취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중국엔 가야지!